참을 수 없는 일상의 지루함에 우리는 충분히 지쳐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서문에는 "비록 커다란 제스처를 취하지도, 커다란 울부짖음을 내지 않지만, 그놈은 지구 위를 어기적거리며 커다란 하품 속에 기어이 세계를 삼켜버리려 할 것이다. 그놈은 바로 지루함이다! 독자여, 눈물이 고인 듯이 축축한 눈을 가진 그놈은 물 담배를 피우며 처형대를 꿈꾼다"는 구절이 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지루함, 이놈은 우리를 처형대로 이끈다. 그 상징적 처형대로 기능하는 하나가 바로 영화관이거나 여행의 낯선 체험이다.

지루함은 어쩌면 반복되는 일상, 혹은 삶 자체에서 오는 권태, 혹은 역겨움 때문이리라. 한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최종적 가치들, 예컨대 신이나 국가나 이념 같은 권위들은 무너졌다. 삶에 시적 위대함을 부여했던 거대신화의 신전은 무너지고 이해관계만 따지는 경제동물들의 산문적 모조신화가 창궐하는 물신의 신전 앞에서 일상은 그저 비루하고 새로울 것 없이 천박할 뿐이다. 감각의 혁명을 부르짖는 문명의 일상적 외관은 그 스펙터클의 관능과 매혹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근면한 태도로 생산을 부추기는 근대의 기획이 낳은 사생아다. 일상이 무의미하게 반복된다는 느낌, 이것이 현대인이 느끼는 지루함의 본질이 아닐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는 느낌, 일상의 산문적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영웅이나 환상적 서사(敍事)를 탐닉하고, 지금 이곳의 차안이 아닌 피안의 어디론가 떠나려는 탈주를 꿈꾼다. 이 비루하고 비천하며 역겨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나치의 추종자가 말했듯이 대중은 이미 비루한 일상에 충분히 지쳐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멋진 환상이다. 그들이 삶의 비루한 일상을 빌미 삼아 대중들에게 전쟁이라는 끔찍한 환상 서사를 심어주었다면, 오늘날의 대중들은 비루한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꿈꾸며 영화관을 찾는다.

이에 비해 여행은 이런저런 현실적 이유로 쉽게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루한 일상의 끈은 우리를 얼마나 집요하게 옥죄는지, 이 세속적 일상의 현실 원칙이라는 얼굴 없는 악마는 또 얼마나 강고하게 우리를 물고 늘어지는지 탈주를 결행하기란 만만치 않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세계에 자진해서 자신을 몰아넣으려 떠나는 여행, 그것은 산책의 소요(逍遙)와는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가출과 같은 것, 완전한 타인과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제의이다. 낯선 땅에서 우리는 일상의 비루함과 지루함이란 괴물을 처형대로 이끌며 지각의 갱신을 이룩하는 것이다. 하여 여행은 존재의 전환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상징적 죽음의 체험에 가깝다.

참을 수 없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여행은 하나의 매혹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매몰된 감각을 일깨워 세계를 다르게 지각하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룩하려는 탈주의 욕망이다. 우리가 거듭 집에 머물기만 한다면 우리는 가축이 되거나 잘 길들여진 기계인간이 될 뿐이다. 현실의 원칙에 의해 사육되는 가축, 끔찍하다. 모든 여행엔 무미건조한 일상의 무게와 억압적 현실 원칙의 규제를 넘어서려는 초월적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여행은 일상적 삶에 달라붙은 현실 원칙의 딱딱한 각질을 벗겨내는 행위이다.

단체관광이 아니라면 여행자는 미지의 시간과 공간을 능동적으로 모험하고 탐색한다. 그 탐색은 새로운 체험을 통해 삶의 내밀한 역동성을 일깨운다. 낯설고 허술한 간이역에서, 바다 냄새 가득한 어느 포구에서, 만산홍엽의 어느 산비탈에서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상의 비루한 짐을 부려놓는다. 그리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떠나는 여행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는 것이다. 여행에도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어딘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낯선 세계와의 신체적 교감이다. 새로운 세계에 무뎌진 감각을 벼리는 일이다. 그러면 세계는 날것의 상태로 그 싱싱한 관능의 속살을 우리에게 드러낼 것이다. 우리를 새로운 존재의 열림과 떨림으로 이끌 것이다.

가을, 일상의 지루함과 비루함과 역겨움을 뒤로하고 떠나기 좋은 계절 아닌가. 지친 몸이 막차에서 내려 불 꺼진 그대 집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일상의 울타리를 벗어나 보아야 안다. 자유는 아름답다는 것을. 하여 생산성과 근면성을 부르짖는 근대의 기획이 획책하는 현실 원칙의 삶을 뿌리치고 한 번쯤 일상을 배신할 일이다. 아름다움이란 게 별거 있겠는가. 우리의 몸과 마주치는 어떤 긴장이고, 그 긴장 속에 한껏 당겨진 활처럼 팽팽해진 삶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