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반복되는 ‘오늘’을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사람은 자유와 새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꿈꾼다. 여기,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그 바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길을 떠난 가족이 있다.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진정한 삶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함께하는 행복을 배웠다는 이 용감한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번 달에는 아르헨티나의 자연에 취하고, 파라과이의 거리를 둘러본다. (편집자 주)

푸르마마르카 마을 전경.

일곱 빛깔 무지개색의 자연
처음 남미에 도착해서 엔젤 폭포 투어를 가기 전에 한 스위스 커플을 만난 적이 있다. 남미에서만 5년째 거주하고 있는 여자친구를 찾아서 남자친구가 온 거였는데 이 커플에게 ‘남미에서 가볼 만한 곳 족집게 과외’를 받았다. 그때 이 친구들이 찍어준 곳 중 하나가 아르헨티나 후후이 주의 비경들이었다. “리, 이쪽은 일반 여행자들이 거의 가지 않는 곳인데 정말 좋은 곳이야. 남미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나 할까?”라는 말에 내심 ‘꼭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여행 중 칠레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에 살던 미국인 아저씨 역시 ‘강추’한 곳이었고, 또 마침 이곳이 우리가 지나가는 루트상에 존재하니 안 가볼 수가 없지 않겠는가.

지도를 보며 차를 몰고 가는데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보인다. 황량한 사막 지형의 메마른 산에 자라는 거라고는 커다란 선인장뿐이었지만 그런 곳에 사는 주민들을 위로라도 하듯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자연을 보니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마을에 잠깐 차를 세우고 마을 구경을 하다가 다시 출발했다. 차를 몰고 조금 더 가자 드디어 우리 앞에 무지개색의 산들이 펼쳐졌다.

마을에서 식사 중인 덩헌.(사진 위) 한규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기타로 장난을 치는 멜라니의 모습.

푸르마마르카는 ‘레인보우 마운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곳으로 각 산의 색깔이 모두 다르다. 각 산을 이루는 주요 광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산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이다.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등 갖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산들의 모습은 마치 태초에 신이 파스텔로 쓱쓱 장난을 쳐놓은 듯하다. 심지어 어떤 산은 반 가른 듯이 이쪽과 저쪽의 색깔이 다를 정도다. 그 위로 드리워진 구름의 그림자들 역시 운치를 더한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여행은 하면 할수록 더 보고 싶고 더 가고 싶어진다. 역시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중독에 빠진 여행중독자들인가 보다.

수렁에서 차를 건져내다
푸르마마르카 협곡을 달리다 보니 저 멀리에서 차 트렁크 위에 올라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뭘 저렇게 반가워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같이 손을 흔드는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손짓이 점점 다급해진다. 뭔가 세워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랄까? 차를 세우고 내려보니 이 사람들이 설명하기도 전에 무슨 상황인 줄 알겠다. 길옆의 심한 경사로로 차가 잘못 내려가서 밑의 고랑창에 앞바퀴가 떠 있는 상태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위기의 차는 칠레 차였고, 그 옆엔 조그만 아르헨티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칠레 차의 긴급 상황을 보고 아르헨티나 차가 섰지만 아르헨티나 차로는 칠레 차를 끌어올릴 수 없으니 일단 다 뛰어내려서 차가 아래로 빠지지 않도록 뒤 트렁크 위에서 차의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오지인데 대체 이 사람들은 거기서 얼마나 버티고 있었던 것인지….

‘레인보우 마운틴’으로 불리는 푸르마마르카의 모습. 실제로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경이로운 무지개빛 산이다.

일단 우리 차를 돌려서 뒤꽁무니를 그 차에 바싹 대고 로프를 연결했다. 우리 차, 비록 리터당 연비가 6km 남짓 나오는 기름 먹는 기계지만 덩치에 어울리게 힘이 좋아서 아무런 문제없이 단박에 칠레 차를 끌어올렸다. 그 즉시 아르헨티나, 칠레, 한국 3개국 사람들의 환호성이 사이좋게 푸르마마르카 협곡에 울려 퍼졌다.

평생 볼 나비를 하루에 다 보다
파라과이 국경을 넘어 아순시온을 향해 달리는데 어느덧 고산지대를 내려와서인지 상당히 덥다. 파라과이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는 남미 여행자들 사이에서 이미 악명이 자자하다. 에어컨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나올 정도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뭔가 하늘하늘한 것이 길 위에 나풀나풀 떠다닌다. ‘뭐지? 꽃가루인가?’ 하며 자세히 보니 나비다. 형형색색의 나비가 길 위에 가득 날아다니는 거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날아다니는 나비가 제법 운치 있다. 그런데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심지어 나중에는 와이퍼를 작동해야 할 만큼 많다. 가다가 비포장도로라도 나올라치면 아예 길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아마도 날이 너무 덥다 보니 한낮엔 시원한 곳을 찾아 길 위에서 나름의 피서를 하나 보다. 딱히 우리 잘못이랄 건 없지만 운전을 하면서 너무 많은 나비를 치어 죽이다 보니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날은 덥고, 나비도 짜증나게 하고…. 이거 파라과이 괜히 가는 거 아냐?

반갑다, 짬뽕아!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아순시온을 수도로 둔 파라과이는 남미 국가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한인 이민자를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 중 만난 많은 남미 교민들이 파라과이에서 최초의 이민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가 파라과이를 찾은 단 하나의 이유는 여행 중 만난 선배가 “파라과이의 경제는 한인이 꽉 잡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고, 부차적으로는 그런 곳이라면 맛난 한국 음식점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한인촌에 가서 숙소 정보를 얻고(파라과이는 여행자들이 하도 찾지 않는 곳이라 그 흔한 호스텔 하나 없다) 숙소에 들어갔다. 도착한 첫날 저녁, 거리의 온도계에 따르면 밤 10시의 기온이 38℃. 에어컨이 없으면 죽을 거 같은 날씨다. 여행 이후 최초로 4성급 호텔에 짐을 풀었고(그나마 물가가 싸서 60달러 정도면 세 식구가 묵을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아순시온에 머무는 동안 계속 한인촌으로 밥을 먹으러 다녔다.

파라과이를 떠나며 만난 폭우.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둘째 날 찾은 한 중국집. 얼큰한 짬뽕에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들어갔는데 오오옷!!! 진짜 맛있다. 게다가 내륙국가인 파라과이에서 해물짬뽕이라니!!! 사장 아주머니에게 여쭤보니 놀랍게도 아주머니는 화교 출신으로 한국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다가 한인들이 파라과이에 넘어오기 시작할 때 파라과이로 재이민을 오신 거란다. “거기 들어간 홍합이랑 오징어는 칠레에서 왔고, 채소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거야.” 각 나라의 재료가 혼합된 다국적(?) 짬뽕의 맛에 우리 가족은 그만 홀랑 넘어가버렸고 아순시온을 떠날 때까지 하루에 한 번씩 가는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이국땅에서 만난 김남주
아순시온에 머무는 동안 이것저것 할 것을 찾아보려 했으나 인간적으로 너무 더웠다. 아침에 호텔 조식을 먹다가(호텔 안은 물론 매우 시원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니까) 담배 한 대 피우려고 나오면 바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심지어 호텔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는 그 짧은 시간에 코에서 흘러내린 땀이 라이터에 떨어져서 라이터가 켜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워낙 할 거 없는 나라에 워낙 대책 없이 들어간데다 워낙 덥기까지 하니 이건 가라고 등 떠미는 것보다 무섭다. 어쨌든 싫으면? 떠나야지.

아순시온을 향해 달리는 길에서 만난 나비떼. 라디에이터에 이만큼이 달라붙었다. 그 밖의 차체의 자국도 죄다 나비가 부딪혀서 생긴 것들이다. 국경 서류 심사 중. 언제나 무척 피곤한 일 중 하나다. 파라과이, 브라질, 칠레가 합쳐지는 시우다드 델 에스테에서 배우 김남주를 만났다.

떠나려고 짐을 싸서 출발하는데 파라과이를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무섭게 폭우가 쏟아진다. 이렇게 비가 오려고 계속 무더웠나 보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길이 그대로 바다가 된다. 역시 빨리 가란 얘기다. 겨우겨우 아순시온을 벗어나서 한참을 달려 파라과이, 브라질, 칠레가 합쳐지는 시우다드 델 에스테에 도착했다. 이 곳은 ‘남미의 용산’이라 불리는 온갖 가전제품의 천국이다. 그만큼 파라과이의 한국 교민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어차피 이곳에서 묵을 생각은 없었기에 지나가다가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햄버거 하나를 먹는 것으로 파라과이의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밖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건물의 전면을 뒤덮은 옥외광고판을 장식하고 있는 배우 김남주의 얼굴. 역시나 한류의 힘일까? 파라과이 교민의 힘일까? 무엇이든간에 왠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